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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맨(Cinderella Man, 2005)' 먼지투성이 속 한 남자의 빛나는 유리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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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많든, 여자들이라면 신데렐라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유리구두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 하게 됩니다. 요정이 나타나서 마차와 드레스를 주면서 화려한 파티에 초대해주고, 그 곳에서 왕자를 만나고, 헤어지지만, 다시 유리구두를 통해 행복을 찾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하고 말입니다. 지금의 삶이 행복에 가깝다면 이런 신데렐라 이야기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삶이 어렵고,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면 0.1%의 가능성 없는, 그런 신데렐라 이야기가 더욱더 귀기울여지고, 나에게 일어나길 바라게 됩니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그런 남자 이야긴줄 알고 '신데렐라 맨'이란 영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영화 '신데렐라 맨'은 그런 불가능한, 남의 힘에 의지한 이야기가 아니였습니다. '신데렐라 맨'은 한 남자의 처절하고 눈물겨운, 가족을 위한 한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 우리 모두가 감동을 받을 그런 영화였습니다. 단지 영화가 너무나 정직한 결과를 보여 지루할 수도 있지만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 단순함을 위대함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싱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던 브래독. 미국에 대공항이 닥치자, 유망했던 라이트 헤비급 복서 브래독(러셀 크로우 분)은 링 위에서 잇단 패배와 부상으로 복싱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브래독은 복싱 뿐아니라 다른일을 하기에도 나이가 들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각종 허드렛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링에 다시 오르지만, 부상만 당하고 돈도 벌지 못하고 출장정지까지 당하게 됩니다. 브래독은 다시 막노동일을 나서지만, 아내와 세자녀가 함께 사는 지하방에는 전기도 끊기고 더이상 먹을 것이 없어지고, 아이까지 다른 집에 맡겨져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링위에 오르고자 합니다.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기

'스켈리톤 키(The Skeleton Key, 2005)'믿는 만큼 보이고, 믿는 만큼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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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영화라면, 분명히 제가 안받을 거라고 믿는 분들에게 호러영화에 대한 스팸을 오늘은 날립니다(!) 예전에 보던 TV 드라마 중에 '제시카의 추리극장'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제시카 아줌마는 항상 살인사건을 추리하고, 해결하고 다니셨습니다. ㅋㅋㅋ 타자기 치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드라마였죠. (영상링크를 아는데, 이게 또 저작권문제라...) 무서운 드라마는 싫어했지만, 유독 추리 소설과 추리 드라마, 혹은 영화는 보면서 풀어가는 재미를 주기에 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추리 영화들이 호러와 겹쳐서 못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요. 보고나서 앞에서 부터 쭉 생각을 해보면 딱 맞아 떨어지는, 짜릿한 그런 느낌이 바로 추리 소설을 읽고, 추리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게 되는 이유인데요. 바로 얼마전 그런 추리를 완결하는 듯한 영화를 봤습니다. UIP 이실장님이 맛있는 거 먹으러 오라시는 터에(^^;) 혹해서 가서 보게 된 영화이기도 한데요. 영화 '스켈리톤 키'는 보면서 무서워서 못본 장면들도 있지만, 예전에 봤던 바로 '제시카의 추리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캐롤라인(케이트 허드슨 분)은 뉴올리언즈의 한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편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녀는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 측은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을 단순한 돈벌이로 생각하는데 차츰 환멸을 느끼던 차에, 어느 집에서 개인 간병인을 구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지원,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늪지대에 위치한 오래된 대 저택의 개인 호스피스로 가게 됩니다. 그 곳의 주인 노부부 바이올렛(지나 로랜즈 분)과 벤 데버로(존 허트 분)가 살고 있습니다. 벤 데버로는 충격으로 쓰러져 말도 못하고 전신이 마비된 채 죽어가는 사람. 캐롤라인은 그를 극진히 간병하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집안에 캐롤라인은 식물인간 같은 벤의 눈빛에서 뭔가를 두

'판타스틱 4(Fantastic Four, 2005)' 유한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

인간 역사상 죽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모두 유한한 인간이다. 우리는 이런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죽음, 두려움을 이기고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해 갖가지 노력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 앞에서 초라한 육체를 가진 유한한 인간이듯, 우리가 가진 능력 또한 어느 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한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한 번쯤 "내가 초능력을 가졌다면..." 이라는 상상을 할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 인간 앞에 놓여있는 한계를 뛰어넘어 보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 한계를 절대 뛰어넘지 못 한다. 이러한 우리 인간에게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자극하는 것이 바로 사이비 종교이다. 물론 기성 종교도 이런 기능을 할 때는 사이비 종교로 볼 수 있다. 사이비 종교라고 좋은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종교의 가장 큰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이런 희망이 주입된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가 없다. 우주 탐사를 갔던 리드, 벤, 수, 쟈니와 빅터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초능력을 갖게 된다. 4명은 판타스틱 4가 되어 자신들의 초능력을 선용한다. 하지만 권력에 눈이 먼 둠은 자신의 초능력을 악용한다. 결국 판타스틱 4와 둠의 대결에서 선의 승리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판타스틱 4의 멤버들은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다시 유한한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자신들의 초능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둠은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초능력을 사용하여 신처럼 되려고 한다. 하지만 무한한 신이 될 수 없는 둠은 처절하게 죽게된다. 이런 '판타스틱'한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이런 영화의 주인공들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한 번 그렇게